정부서울청사갤러리, 2020. 6.1-6.26
일반적으로 미술의 감상법은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은 형식보다 내용을, 스타일보다 콘셉트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점차 회화 제작에 지적인 사고와 논리적 구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화의 서정성과 낭만성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감상자들은 작품을 느끼기보다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보이는 형식 이면을 가슴으로 모색하기보다 머리로 해석하고 행간의 의미를 논리적 정당성으로 메워왔다. 그래서 미술은 ‘느낀다’라는 행위 보다 ‘읽는다’라는 텍스트의 의미가 강해졌다. 읽는다는 개념의 중요성은 작품 제작의 이념이나 철학, 언어적 의미나 해석을 강조하면서 마치 어려운 철학 문제를 풀 듯이 작품의 본질을 설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면 할수록 무언가 해결하지 못한 정답에 대한 의문을 자문하게 된다. 작품을 알기 위해 축적한 지식과 철학은 작품과 감상자를 더욱 유리시켜 작품과의 공감대 보다 왠지 더욱더 멀어져가는 낯선 존재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간격을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자세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情)과 경(景)의 소통을 통한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의미한다. 景은 자연과 같은 대상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의미하며 情은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대하는 정신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경은 객관적이며 지적이고, 정은 주관적이며 정감적인 태도이다. 예술이란 이 두 요소 간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경의 상생(相生)을 통해 대상과 자아와의 통일,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情中景’ 또는 ‘景中情’ 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하나 됨을 통해 서로 상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거기에는 반드시 ‘진실함(眞)’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수호 작가는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회화 사조에서 통용되는 움직임이 없는 대상, 멈춰진 경물을 표현한 정물화(靜物畵)가 아닌 ‘정(情)이 깃든 대상’이라는 의미로서 ‘정물(情物)’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情이란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적인 경계도 의미하지만, 뜻이라고 하는 작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이 사물이나 대상을 만나 융합하면서 생성되는 경계(意境)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이와 같은 정경의 상호작용을 통한 내적 체험과 외적 세계가 합일된 회화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김수호 작가는 대상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 깃든 ‘부재의 기억’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 속에 부재(不在)란 대상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의해 무력하게 사라지거나 상실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부재의 기억은 지붕이 없는 집처럼 불안정하며, 외부의 충격에 의해 일어난 물의 파장이 곧 잠잠해지듯이, 피움의 역할을 다한 모기향이 한 줌 재가 되듯이 소실된 기억이다. 그러나 작가는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 기억 속 상실된 조각을 현실로 끄집어내고자 한다. 망각 속에 내재해 있던 심상의 풍경을 대상 앞에서 포착된 시선과 자각을 통해 기억의 부재를 메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스며들 듯 중첩된 담한 색채의 장지기법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오늘에 되살리듯 담담하게 대상의 부재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현수 작가는 제주도의 자연을 중심으로 한 기억 속 장면을 포착하여 화면에 재현하고 있다. 무의식 또는 아득한 기억을 되짚어 꺼낸 초록색의 형체들은 나무가 되고 풀잎이 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생물들과는 다르다. 풀(草) 같은 선들과 숲(林) 같은 덩어리들은 일견 제주도의 흔한 풍경인 듯하지만, 도리어 구체적인 구상화보다 허상의 추상회화에 가깝다. 그래서 작품 〈푸른 정원〉은 작가의 추억을 통해 걸러진 제주의 흔적이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성이나 언젠가에 존재했던 시간성이 무의미한 작가의 심상을 통해 재창조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만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어디선가 보았던 정겨움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景으로서의 객관적 체험에 정감 어린 감성이 스며든 정경(情景)으로서의 풍경이 고향과 같은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장영은 작가는 김현수 작가의 대상에 대한 거시적인 접근과 달리 미시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시각법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체라기보다 손에 잡을 수 없는 그림자의 실루엣과 가깝다. 그러나 그 푸른 실루엣을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대상의 실체를 느끼게 하면서 여백은 은은한 빛과 같이 대상을 조명하고 있다. 또한 푸른 색채를 통해 산과 물, 하늘과 바다 소위 자연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며, 시간이 축척되듯이 쌓인 색면 위에 한 땜 한 땜 엮인 바느질 결은 식물의 맥이자 혈관으로서 은빛 반짝임을 통해 살아있는 생동감을 부여한다. 장영은 작가는 현실에서는 움켜잡을 수 없는 기억의 잔상들을 빛과 자연의 모습을 통해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순간이 아닌 영원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쌓아 올린 푸른 색채의 깊이감은 통해 우리의 감성도 빨아들이듯이 푸른 자연으로 회귀하고픈 감정을 자아내고자 한다.
윤겸 작가는 외상에 의한 시각적 착시의 현기증으로부터 작업이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망실의 시각이 아닌 밝은 색채의 희망적인 색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만 작품 〈아스라이〉와 같이 대상의 분명한 묘사보다 멀지만 희미한 아스라한 풍경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시각은 사물을 직시하게 하고 사실적으로 파악하게 하지만 시각과 인식의 차이는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자주 깨닫게 한다. 어찌 보면 육체적인 육안(肉眼)을 통한 대상의 통찰은 대상의 본질에 접근함에 있어서 도리어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윤겸 작가는 스스로 시각과 인식의 간격을 불안정성이라고 지칭하면서도 자신의 시각적 외상을 승화시켜 심안(心眼)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아스라한 화면을 통해 욕심부리듯 무언가 도상을 찾으려는 집착을 버리고 텅 빈 허정(虛靜)의 맘으로 대상의 심연을 통해 명상하는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네 작가들의 작품은 일견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그러나 도상의 부재와 여백은 작품에 대한 불완전성으로 다가오기보다 빈 공간을 사유하듯 감각적 경험을 되살리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리고 언어적 이해보다 정서적 소통을 더욱 중요시한다. 그리고 네 작가의 공통점은 스치듯 스며든 풍경을 구도자와 같이 끊임없이 반복된 선과 색의 중첩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들에게 스치듯 지나간 시간과 공간은 가볍게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의 중첩 또는 선과 면의 반복을 통해 어느덧 화면에 스며들어 정(情)이 깃든 풍경으로서 추억 또는 기억으로 주변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대상이 고정된 죽은 경물로서의 정물화(靜物畵)가 아니라 감성이 스며든 운동태로서 情·物·畵라고 이름하였다.
나형민(경희대학교 한국화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