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Miyeon


물성과 흔적의 기록자


  김수호 작가는 자연의 물성과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성과 시간성을 탐구하며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물질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요소들을 수용하며, 자신만의 동양적 미감으로 발현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주로 장지 위에 흙, , 분채 등의 재료를 활용하며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긴 호흡으로 실험하고 기록하며 자신만의 색과 표현 기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김수호 작가의 작업은 동양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동양화의 전통적인 매체 위에 흙과 먹을 활용하여 공간과 깊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마치 자연이 스스로 흔적을 남긴 듯한 유기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그는 장지 위에 흙과 먹, 분채 등의 재료를 겹겹이 쌓아 올리거나, 물과 함께 흘려보내면서 시간과 물질의 흔적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회화적 행위를 넘어, 마치 자연의 풍화 작용이나 지층의 형성을 연상시키는 물질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단순한 평면 회화를 넘어선 물질적 풍경이라 할 수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성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유도한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흔적지움의 반복적인 과정을 짚어낼 수 있다. 그는 재료 자체가 지닌 속성과 그것이 남긴 흔적에 주목하여, 장지 위에 흙과 먹을 쌓아 올리고 물과 함께 흘려보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마치 자연이 스스로 그려낸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문 없는 문(2017, 2019) 시리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수호는 이 시리즈에서 공간 속에서의 드러남과 사라짐을 동시에 탐구한다. 문이라는 것은 본래 경계를 형성하는 구조물이지만, 작품의 화면 속에서 문은 실재하지 않는다. 작품 속 문은 경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열린 공간을 암시한다. 그리고 형태는 흐릿하게 나타나거나 흔적으로만 남겨진다. 문이 없다는 것은 곧 물리적 경계를 초월한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하며, 이는 그의 작품이 특정한 공간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되는 개념적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문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상징하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문이 뚜렷하게 형상화되지 않고 흐릿하거나 부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문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고정된 형태와 경계를 초월하는 동양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으며,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가의 사고를 반영한다.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자세는 생명성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한 사람의 숨(201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호흡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시리즈 중 하나다. 화면에는 깊고 은은한 색감이 사용되었으며, 점진적으로 퍼져 나가는 먹의 흔적이 마치 숨결처럼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통한 자연의 변화는 흐르는 비(2018, 201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지 위에 물과 분채를 흘려보내는 기법을 사용하여 비가 내리는 순간과 그 흔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흘러내린 물감이 남긴 자국은 마치 비가 스며든 대지를 연상시키며, 물질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강조한다. 이는 동양화에서의 발묵(潑墨) 기법과 유사한데, 우연성이 개입된 작업 방식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변화와 흔적은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젖은 자(2018)마른 길(2019)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젖은마른의 대비적인 개념을 통해 물질과 비물질, 변화와 정적 상태의 공존을 탐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젖은 자는 물이 스며들어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마른 길은 물이 증발한 후 남겨진 흔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젖은 자에서는 물기가 스며든 장지의 질감과 얼룩이 강조되며, 젖은 흔적들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물리적 변화가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형태미를 담아내면서 물질과 비물질, 형상과 비형상의 공존을 이루어 낸다. 마른 길은 전작과 대비되는 작품으로, 물이 증발한 후 남은 흔적과 균열은 의도적으로 통제하지 않은 자연적 미감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미감은 동양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연결되며, 마름과 남겨짐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회화적 서사를 만들어 낸다.
  그는 젖음과 마름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물이 마르고 남은 자국들에서 시간의 흔적을 암시하며, 사라짐과 남겨짐이라는 개념을 탐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동양화의 발묵(潑墨) 기법과도 유사한 방식의 우연적인 번짐 효과는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조형적 실험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무위(無爲)의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 기법을 현대적으로 확장하여, 물질과 시간의 상호작용을 깊이 탐구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를 감지할 수 있다.
  김수호의 전작들에서 다루어졌던 시간의 흔적은 빈집(2019)에 와서는 건축적 공간과 기억을 다룸으로써 드러나고 있다. 빈집은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화면에는 텅 빈 공간이 강조되며, 이는 인간이 떠난 자리에서 남겨진 정서적 잔상을 형상화한다.
  몇 년 동안의 재료의 물성에 관한 실험에 몰두했던 작가는 2023흙물시리즈를 발표한다. “여기서 작가는 다시 흐르는 물 그러므로 젖은 자를 소환한다. 흙물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단단한 돌의 표면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림은 돌의 표면 질감도 같고, 땅의 표면 질감도 같고, 나무껍질도 같고, 클로즈업한 피부의 표면 질감도 같고, 그리고 흐르는 물결(그러므로 물의 질감)도 같다.”* 이 시리즈는 자연적 요소와 인간적 개입이 교차하는 순간을 기록하며, 물질이 만들어 내는 유기적 형태들을 보여준다.
  최근작 손으로부터(2024)는 손이라는 인간의 신체적 요소를 중심으로 작업한 시리즈이다. 김수호는 손으로부터매 순간 손의 시선에서, 매 순간에 대한 시간을 일 년의 일수로 나누어 표현하면서, “그 안에서 흙탕에서 숨겨진 다양한 색의 가능성을 펼쳐보고자” 한다.** 손은 창작의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이 작품에서는 손의 움직임이 남긴 자국들이 화면 위에서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 작용하며, 인간과 자연, 행위와 결과의 관계를 탐구한다.
  김수호는 10여 년 넘게 시기마다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물질성과 시간성, 존재와 부재의 개념을 탐구하며, 회화를 넘어선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장지 위에 흙, , 분채 등을 활용하여 자연의 흐름과 물질의 변화를 기록하며, 존재와 부재 사이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탐색한다. 이 과정을 통해 김수호는 전통적인 장지 회화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확장하고, 물과 흙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변화와 흔적의 미학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명확한 형태보다 흔적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흔적은 과거의 존재를 암시하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여백(餘白) 개념과도 맞닿아 있으며, 작품 속 비어 있는 공간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김수호는 이러한 방식으로 화면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고정된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한다.
  각각의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는 개별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김수호 작가의 예술적 탐구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흔적을 통한 사유의 확장으로 읽어낼 수 있으며, 동시대 미술에서 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김수호의 작품은 물질적 표현을 통해 비물질적 사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의 작업이 단순한 형식적 탐구를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담론 속에서 주목받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작가는 물성과 자연의 흐름을 통해 동시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존재와 시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의 작품이 앞으로도 더욱 확장된 형태로 발전해 나가길 기대하는 바이다.

*고충환, 젖은 자와 마른 길이, 돌의 주름과 흐르는 물결이 순환하는,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8기 입주작가 결과보고 개인전-흙탕』, 박수근미술관, 2024, p. 7.
**김수호, 작가노트 손으로부터, 2025에서 인용


박미연 (뮤지엄호두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