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속 한 대목이다. 신을 속인 죄로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형벌은 거대한 바위를 굴려 뽀족한 산 정상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애써 올린 바위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밑으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질 걸 알면서도 쉴 새 없이 계속하는 고독한 바위 굴리기는 무익하고 희망 없는 노동, 죽을 걸 알면서도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삶이란 형벌일까. 그 안에서 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의 지점에서 앞서 인용한 카뮈의 말을 되새겨 본다. 카뮈는 바위의 무게와 싸워야할 인고의 시간에 주목하기보다, 이미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가는 그 짧은 시간에 대해 숙고한다. 그 시간은 숙명을 직면하는 의식의 순간이다. 자신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주저앉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운명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의지와 태도는 바위보다 강인하다. 아티스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섯 작가의 이 같은 저항의 여정은 진행 중이다. 무모해 보일지 모르는 예술 행위의 저마다의 의미 찾기는 계속 될 것이다. On going!
몸은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작동하는 실체이다. 또한 경험을 체득하는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때로 불가피한 현실 앞에서 나약한 공허감을 내뿜는다. 특히 현대 사회에 이르러 수동적으로 변모된 몸, 불안하고 파편화된 신체를 목격한다. 김수호는 그동안 이러한 몸의 이미지를 화면에 담아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형상을 지우고 이야기를 내포하지 않는 태도와 방식으로써의 작업을 선보인다. 자신만의 기준과 법칙을 세워 제한된 색으로 사각형과 7개의 동심원 작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작업 역시 이전의 몸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생각하면서 남겨진 기억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김태완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몸부림을 영상에 담아낸다. 붉은 빛 화면 가득히 처절한 몸짓과 소리 없는 절규가 메아리친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저항 작업을 계속해 온 김태완의 전시작 〈젊은 예술가의 통성 기도〉는 청년을 자살로 내몰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그것을 바꾸려는 간절한 기도이다. 유한한 생의 가운데, 굳이 먼저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고백과도 같다. 나날의 괴로움을 감내하며 고생할 것까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희망 없음과 무익함의 절정에 도달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한 작가는 청년 자살을 둘러싼 사회문제 해결의 절실함을 통성기도에 빗댄 예술 언어로써 호소한다.
전쟁이 더 이상 눈앞의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폭력성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때로 무관심 속에 아름답게 은폐되기도 한다. 나미나는 과거 미국이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던 제주도와 오키나와에 실존한 폭력의 잔상과 그에 투쟁하는 현실을 ‘영상회화’작업에 담는다. 이로써 평화로운 관광지라는 장막에 가려진 상처를 들춰낸다. 나미나는 영상과 회화, 이 둘의 오버랩을 통해 여러 층위로 존재하는 시간의 단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상이 촬영된 현장의 시간, 그 영상 속 정지된 화면이 회화로 옮겨진 시간, 같은 현장에서 파생되어 분리된 이 둘의 시간은 전시장 안에서 다시 겹쳐지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이 아닌 불가분의 관계임을 상기시킨다.
노의정은 눈에 보이지 않아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분명 우리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를 소재로 하여 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거주지 ‘살기 좋은 도시 대전’이 실은 핵폐기물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당장 피해가 없으니 넘어가려는 안일한 태도가 결국 도시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인다. 방사능과 오염 물질에 대한 심각성을 전달하고 싶어 죽음을 암시하는 요소를 화면에 강하게 배치하였다. 전시작 〈사라지는 중〉과 〈파괴된 도시〉에서 작가는 일반적으로 자연을 상징하는 초록빛 색채를 오염되어 죽음에 다다른 신체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안전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유지혜는 할머니를 마주하거나 생각할 때 하염없이 슬퍼지는 증상에 대한 원인을 찾고자 했다. 의식적으로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억 속 과거의 할머니를 계속해서 소환하려 한다. 할머니와 함께하면서 수집한 기록을 분석하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습관들을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반복적 습관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찾게 된다. 그것은 기억 속 과거의 할머니와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실재의 할머니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거나 회피하여 일시적으로 안정과 치유를 구하려는 행동들을 작업화 하였다.
이시내는 도시 풍경을 보며 느꼈던 시각적 부조화를 자신의 조형충동으로 해소한다. 작가는 무질서한 도시 풍경 속에서 피로와 혼란을 느끼는 동시에 흥미와 호기심이 생긱는 양가적 감정을 경험한다. 그 후 이질적인 도시풍경의 틈 속을 파고들어 비례, 균형감, 율동, 대칭 등 조형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작 〈회색실험〉은 값싸고 빨리 마르는 특성으로 인해 건축의 주재료로 쓰이는 시멘트의 색다른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다. 꽃, 과일, 종이 등 일상의 재료들과 시멘트를 한데 버물려 새로운 도시 풍경을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실험의 결과물로 영상과 사진 그리고 조형에 쓰인 재료와 순서를 공유하는 가이드라인을 선보인다.
유난히 뜨거웠던 2018년 여름, 6명의 작가들은 한 달간의 아티스트 인큐베이팅 중간 전시를 마쳤다. 수업과 토론, 전시를 통해 얻은 피드백과 경험을 가지고 또 다른 곳에서 끊임없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일생에 맞이하게 될 수많은 변곡점들, 그 중에는 미리 예상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일도 있고,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아챌 수 있는 일도 있고 영영 알지 못하게 되는 일도 있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들을 호수가에 앉았지” 산울림의 노래 속 반복되는 이 가사는 앞뒤의 반주의 분위기에 따라 그 심상을 달리한다. 때로는 풋풋하고 경쾌하게 때로는 우울하고 무겁게, 여섯 작가의 앞으로의 행로에 어떤 반주가 가해질까. 이들의 질곡과 도전, 희열과 열정에 건투를 빈다.
추희정(가나아트부산 큐레이터)